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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에 대한 종교적 고찰-자살과 생명의 소중함- 월호스님   2009-04-13 (월) 14:29
불교여성개…   6,666


웰다잉에 대한 종교적 고찰


-자살과 생명의 소중함-


월호(쌍계사 승가대학 교수)




1. 자살과 그 원인


최근 잇따른 유명연예인들의 자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심지어 모방자살인 베르테르효과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2003년 이후 해마다 OECD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며, 지난해의 경우 1만 3천 36명, 올해 상반기에는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흔히 경제적 원인이나 외부의 스트레스 혹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나 상대적 박탈감 등을 들곤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서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테면, 자살자보다 더한 경제적 궁핍과 스트레스 혹은 비관적 상황 등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살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은가?


이는 국가별 행복지수가 경제적 지표와 일치하지 않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예컨대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경제대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행복지수는 대부분 100위권 이하이며, 뉴질랜드 근처의 자그마한 섬나라인 바누아투나 방글라데시 같이 경제적으로 보잘 것 없는 나라들이 행복지수 1위를 달리고 있다. 결국 외부적 원인은 행복과 불행의 주된 요인이 아니며, 보다 근본적 원인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2. 인연(因緣)의 공식


불교에서는 인연설(因緣說)을 말한다. 여기에서 인(因)은 주관적 요인이며, 연(緣)은 객관적 요인이다. 주관적 요인이란 나의 마음가짐이나 노력 등을 말하며, 객관적 요인은 주변상황을 의미한다. 예컨대 경제적 상황은 연이며,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가짐은 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전에 비해 경제적 상황이 엄청 열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삶은 더욱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인(因)×연(緣)=과(果)가 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스트레스가 100만큼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100만큼이면 고통은 100×100=10,000이 된다. 하지만 외부에서 주는 스트레스가 두 배인 200이 되더라도, 이를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10으로 줄어들게 된다면, 고통은 10×200=2,000으로 오히려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즉 연이 커지거나 줄어들더라도 인이 어떠하냐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달라진다. 여기서 연(緣)은 이미 주어진 현실이거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적 상황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통제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다스려야 할 것은 인(因)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진정한 웰다잉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현대사회에서 외부적 상황인 연은 점점 복잡다단해져가고 있다. 외국에서의 유가폭등이나 주가폭락 등이 그대로 우리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아울러 인터넷에서의 악성댓글이나 근거 없는 루머 등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물론 이러한 폐해들은 근절되어야겠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얼키고 설킨 현대사회일수록 어떠한 상황에도 여여부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님 당시에 젊은 비구 한사람이 사리뿟따 장로가 자기를 꾸짖고 욕설하며 마구 때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장로를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자 사리뿟따 장로는 이와 같이 대답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마치 저 대지와도 같아서 어느 누가 꽃다발을 바친다고 즐거워하지도 않으며, 혹은 대소변이나 쓰레기를 쌓아 놓는다고 불쾌해 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저는 출입문 앞에 놓인 흙떨이판과 같아서 거지가 밟거나 뿔이 부러진 황소가 밟거나 개의치 않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더러움으로 가득한 이 몸에 대해서 어떠한 애착이나 혐오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마침내 젊은 비구는 사리뿟따 장로에게 자기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을 크게 뉘우쳐 정중히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고, 장로도 젊은 비구의 참회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기가 혹 젊은 비구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다면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대중은 사리뿟따 장로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부처님께서는 게송을 읊으셨다.


“아라한의 인욕은 대지와 같아 성내어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다.


뜻은 문기둥처럼 견고하여 칭찬과 비난에도 동요가 없으며,


마음은 맑은 호수처럼 고요하여, 이러한 아라한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다.”


아라한은 근거 없는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저 대지와 문기둥처럼. 이것은 인이 공(0)이 된다면 연이 아무리 크더라도 결과는 공(0)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에게 더 이상의 태어남은 없다. 왜 그런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동요하는 마음, 아직 못 다한 숙제, 다 태우지 못한 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리뿟따 장로처럼 무아(無我)와 공(空)을 체득한 아라한은 무학(無學)의 경지로서 더 이상 불완전연소란 없다. 결국 진정한 웰다잉이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4. 몸뚱이는 체험학습의 교재


웰다잉을 위해서는 금생에 공부를 해 마쳐야 한다. 인생은 체험학습의 장이다. 우리가 몸 받아 세상에 나온 것은 못 다한 숙제가 있어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공을 체험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몸을 바꾸어가며 태어나게 된다. 몸뚱이가 있어야 공부에 실감이 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학을 공부한다고 하자. 책만 보고 하는 것과 시청각교재를 활용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인들과 함께 몸으로써 부딪혀가며 공부하는 것이다.


생사일대사를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삶과 죽음의 큰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직접 삶과 죽음에 맞닥뜨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몸뚱이는 귀중한 체험학습의 교재라고 말할 수 있다. 숙제를 마칠 때까지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공부가 끝나는 것은 마음이 공해지는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리뿟따 장로처럼 근거 없는 비방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경지,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는 경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완전 연소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도 전에 체험학습의 교재를 함부로 없애버린다면, 결국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지 못하고 다음 생으로 숙제만 더욱 늘려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5. 자신을 방생하고 남을 방생하자.


부처님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킨 분이다. 또한 돈으로부터 해방시킨 분이다. 부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간은 기껏해야 신의 종이거나 돈의 노예로서 만족하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당당히 선언하셨다.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신이나 돈이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신이나 돈의 종이 될 필요가 없다. 업이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지, 콩을 심건 팥을 심건 무엇이 날지를 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우리 모두는 불성을 지닌 귀중한 존재임을 깨우쳐주셨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가능성이다. 신과 인간의 스승인 부처도 될 수 있는데 무언들 될 수 없으랴? 보살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고, 인간도 될 수 있다. 내가 선택한다. 내 작품이다.


그러므로 우울증에 걸린 것도 내 작품이다. 내가 고칠 수 있고, 내가 고쳐야만 한다. 누가 나를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가 먼저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우울증에 걸리고 싶으면 하루에 천 번씩 한숨 쉬면 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하루에 천 번씩 웃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웃다보면 웃을 일이 생겨난다는 자기창조의 법칙이다. 웃을 일이 생겨서 웃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먼저 웃음으로써 웃을 일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참다운 방생(放生)이며 인과법칙을 현실에서 살려나가는 방법이다.


삶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업생(業生)과 원생(願生)이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물결에 휩쓸려 살다 가는 삶이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도도한 업의 물결을 건너가는 것이다. 나도 건너고 남도 건네주는 것이다. 중생은 업생을 살고, 보살은 원생을 산다. 중생은 못 다한 숙제를 해마치기 위해서 태어나며, 보살은 숙제도우미로 이 세상에 온다. 그러므로 보살의 수행은 공(空)으로 향해가는 수행이 아니라, 공(空)으로부터 출발하는 수행이다.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으며, 고정된 ‘나’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중생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과 연민의 서원을 발하여야 한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진 만큼 베풀고, 아는 만큼 전하겠습니다.’


‘생명 해방ㆍ생기 충만 (生命解放 生氣充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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